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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현부덕 나는 언제쯤 버려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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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일반
  • 2023.03.18 02:57
                            
 
“버리기”아니“버리자”사나흘 전부터 내 맘은 온통 버리자라는 생각으로 마음이 차분치 못했다. 몸도 욕심이라는 힘을 버렸기에 머리카락이 은빛으로 물들어가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비울 수 있는, 비워야 하는 나이에 나는 접어들었다. 늦가을의 억새도 마음을 비웠기에 은빛으로 빛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은빛으로 빛나는 노년을 위해서, 비움으로 알찬 생을 다시 살기 위하여 도전을 하고 싶었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살림살이들이 많기도 했다. 뭐 먼저 정리할까. 우선 발바닥의 감촉을 기분 좋게 해주던 카페트와 이불들을 좍좍 빨았다. 아파트 베란다의 빨래걸이로는 부족했다. 하루 종일 보일러를 가동시켜 거실이고 방바닥에 죄다 널었다. 몰랐을 땐 그저 먼지겠거니 했는데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비쳐준 현미경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진드기라는 해충이 먼지처럼 생겨 굼실굼실 기어다니는 것을 본 후로 온통 그것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 같아 찜찜해서 몸까지 근질거렸다. 햇볕 쨍쨍한 날, 단독주택 앞마당에 빨랫줄을 만들어 힘껏 먼지를 털었으면 얼마나 좋을까로 안달이 났다. 진드기 같은 욕심들이 내 삶을 갉아먹는 것 같아 그 욕심들을 털어내고 빨고 비우고 싶었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내 감정에는 얼마나 많은 물욕과 시기심이 있을까. 세제를 넣고 세탁기에 넣어 세탁할 수만 있다면 제일 먼저 하고 싶다.
 
이제 장롱을 열어 몇 년씩 걸려 있는 옷들을 꺼냈다. 버리기도 아깝고 아직은 입을 만한 옷들이 많기도 했다. 들었다 놨다를 몇 번 하다가 다시 장롱으로 들어간 것들이 빽빽하게 많기도 했다. 그래도 한 보따리가 버리자의 대열에 서 있었다. 신발장을 열었다. 주인의 발을 감싸 안고 여기저기 같이 다녔던 신발들이 말갛게 쳐다봤다. 아직은 주인의 발에서 떠나고 싶지 않다는 표정들이었다. 신발과 발의 관계처럼 서로에게 익숙해졌다는 것은 서로의 상처를 공감하며 위로해 줬다는 의미일 것이다. 생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건너오느라 뒷굽이 닳고 조금씩 찌그러진 신발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습기 제거제와 방향제를 넣고 신발장의 문을 가만히 닫아주었다.
발걸음은 이제 서재로 향했다. 방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책방은 버리지 말라는 항의의 눈빛들이 강했다. 밤새워 나를 위로해 주고 감각을 일깨워주던 방. 내 아들이 일기를 쓰고 청운의 꿈을 꾸게 해준 낡은 책상. 온갖 낙서와 옛 서책들을 뒤적거려봤다.‘그래 아직은 그냥 놔두자’노랗게 퇴색한 젊은 날의 꿈을 아직도 깨고 싶지 않는 바램으로 내 안에 간직하고 싶었다.
 
대충 정리하고 허리를 쭉 펴니 현관에 버려질 물건들이 모두 다 나를 쳐다봤다. 내 몸을 입혀 주었고 발을 감싸 주었고 내 정신의 친구가 되어 준 그것들과 작별을 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고마웠다 고마웠어 나랑 함께 한 시간들”
버리고 돌아오며 입속으로 되뇌여 보았다. 치워진 자리가 넓어져 집은 개운하지만 마음은 허전했다.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과의 관계도 그렇다. 어떻게 알았든 처음엔 별 편견 없이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사람의 내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최선을 다해 맞추려고 노력해봤다. 그냥 사온 옷 같은 것도 안 맞으면 이리 뙤작 저리 뙤작 맞춰 보려고 애쓰는데 하물며 사람과의 관계를 조금 안 맞다고 멀리할 수 있겠는가. 멀리한다는 것은 타인과 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거리가 있다는 것. 다가갈 수 없는 거리로 인해 즐거움도 아픔도 함께 나눌 수 없다는것이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가까워지지 않는 그 속엣것들 때문에 사람들은 외로워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외로움이 싫어 마음이 가는 사람들을 곁에 참 많이도 두었다. 그렇게 믿고 살아왔던 세월들. 사람들이 참 많이도 스쳐갔다. 그냥 스쳐간 인연들이었다. 전생에 억겁의 만남이 있어야 이생에선 한 번 스치는 인연이 있다는데 난 도대체 전생에서 어떤 만남을 짓고 어떤 인연을 맺었을까. 만나고 헤어지고, 버리고 또 버려지면서 여기까지 왔다.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언제고 그리움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내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그런 만남은 없는 것일까. 아직도 허기진 마음자리에서 누군가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데 ..
 
이제는 버릴 누구도 채워질 어떤 것도 없는 하루의 일상을 살 뿐이다. 내 것이라고 움켜쥐고 있던 물건들도 보내고 난 자리는 이렇게 허전한데 할 수만 있다면 사람을 버리는 일은 하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아본다. 다시 또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어릴 때부터 본 다듬이돌과 방망이 두 개가 거실 한쪽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다. 할머니가 두드리고 우리 엄니가 두드리던 다듬이돌과 반질반질 손때 묻은 방망이다. 할머니와 울 엄마는 누구한테 하소연할 수도 없는 서러운 세월을 얼마나 두둘겼을까. 네 귀퉁이 모서리가 두리 뭉실 닳아져 지문도 없는 울 엄마의 손바닥을 보는 것 같았다. 늦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달빛을 깨고 나온 다듬이 소리가 처연한 달빛처럼 차고 쓸쓸했다. 울 엄마의 아픔을 대신 속앓이하듯 나란한 방망이 두 짝. 찬바람과 함께 쓸쓸히 방안으로 날아들던 다듬이 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듯했다.
 
‘나도 버릴라고? 이제 어디로 가라고’평화로웠던 고향집 안방 윗목에서 할머니와 울 엄니의 노리개처럼 토닥토닥 토다닥 토닥 장단 맞춰 주던 다듬이돌. 주인은 벌써 먼 세상 가고 없음인가 이리저리 천둥이처럼 끌려다녔는데 이제는 저도 이별을 예감한 걸까. 처연한 모습이다. 그리곤 무연히 쳐다보는 울 엄니의 눈이 보이고 쪽진 할머니의 얼굴이 보였다. 고달픈 바람, 외롭고 쓸쓸한 세월들이 내 가슴으로 확 들어오며 고여 있던 그리움이 봇물처럼 밀려와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여태껏 참고 있는 눈물인가. 꺼억꺽 목젖을 넘어오는 설움덩이들을 쏟아내고 말았다. 울음 끝이 길다고 핀잔을 주던 울 엄니의 부지깽이 매가 그리웠다. 치마폭에 싸안고 잘못한 손녀를 편드는 할머니도 보고 싶었다. 이제는 그만 울라고 달래줄 사람도 없는 세월이 미웠다. 다듬이돌 위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고 또 닦으며 이제는 혼자서도 울음을 그쳐야 했다. 다 버려도 이 다듬이돌 만큼은 아직은 내 곁에 두어야겠다. 그리운 것들은 늘 손때 묻은 아픔인지도 모른다. 울음을 닦아주었던 할머니의 치마폭,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두드렸던 울 엄마의 다듬이 소리, 아들의 눈물이 새겨진 낡은 책상... 그 그리움 가슴에 남기고 분노와 미움 그리고 욕심을 버려야겠다.
 
‘맬겁시 집 청소 한다고 다 헤집어놓고 막판에는 버리지도 못하고 실컷 울기만 했네.’
하던 일 잠시 멈추고 휴, 한숨 한 번 쉬고 맘 추스르며 하늘을 쳐다봤다. 구름 몇 점 흩어졌다 모아졌다 한가롭기 그지없었다.
 
이제 또 뭘 버릴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늙어가는 길, 언젠가는 도달할 길을 가는 동안 무겁지 않은 하루하루를 살기 위하여 날마다 버리는 일을 계속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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