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사가 거울을 봅니다. 챙이 넓은 등산모가 화려합니다. 검은 선글라스는 첩보영화에 나오는 아무개 같습니다. 자신이 생각해도 멋집니다. 출입문 옆에 놓은 등산 가방을 짊어졌습니다. 묵직한 등산 가방이 어깨를 누릅니다. 현관에 비스듬히 서 있는 등산스틱을 들었습니다. 등산준비 완룝니다.
엘리베이터를 탑니다. 벽거울을 봅니다. 한 미모 한다고 생각하며 눈을 찡끗 했습니다. 옥수수같이 쪽 고른 이를 보이며 씩~ 웃습니다. 벽에‘자정부터는 엘리베이터 점검이 있어 운행하지 않습니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습니다. 자정? 그 시간이 넘어 귀가하는 사람도 있어? 중얼거립니다. 손목시계를 봅니다. 늦어도 오후 7시 경이면 집에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산 초입입니다. 등산을 하고 내려오는 사람, 산에 오르는 사람 할 것 없이 인산인해입니다. 나무보다 사람이 더 많습니다. 등산 가방이 좀 무겁기는 하지만 정상에 도착하면 싸 가지고 간 것들을 다 먹을 것입니다. 내려 올 때는 가방이 가벼울 것이라고 생각하니 무거운 것도 참을 만합니다.
김여사가 산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한발 한발 내 딛을 때마다 건강의 샘에서 맑은 물이 솟습니다. 등산 맛은 이 맛입니다. 한참을 오르자 이마에서 땀이 나고 등이 축축합니다. 이 정도 땀이 나면 몸무게가 300g은 줄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힘이 납니다. 등산을 시작한 후로 다이어트 효과를 톡톡히 봅니다. 건강에는 등산이 최고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헉헉대며 정상에 다다를 때 였습니다.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납니다. 김여사는 고개를 들어 소리 나는 쪽을 바라봅니다.“언니, 저예요 45층”같은 아파트에 사는 동생입니다. 친동생이 아니라 백화점에서 우연히 만나 언니 동생 사이가 된 여자입니다.“어마 이게 누구야?”김여사가 여자의 두 손을 잡고 흔듭니다. 여자는 여기서 언니를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김여사를 바라봅니다. 여자가 여기로 등산을 다니냐고 묻습니다. 일주일에 몇 번은 등산을 온다고 말합니다. 건강에는 등산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한 마디 덧붙입니다. 여자가 당근이라고 맞장구를 칩니다. 김여사가 신랑은 안 왔느냐고 묻습니다. 해외로 출장 가서 요즘 ‘룰룰랄랄’라고 어깨를 흔들어 보입니다.
김여사가 조심해서 내려가라고 여자에게 말 합니다. 여자가 언니를 만났으니 다시 올라가야겠다고 합니다. ‘그럼 고맙지 혼자 올라가는 것 보다 이야기라도 하면서 올라가면 좋다.’고 합니다. 정상에 올라가서 도시락이나 함께 먹자고 합니다. 여자가 엄지를 들더니 ‘따봉!’ 외칩니다. 김여사는 45층 여자와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김여사와 45층 여자는 100층 초고층 아파트에서 삽니다. 언젠가 45층 여자가 말했습니다.‘45층에 살게 된 것은 아파트 분양받을 때 제 나이가 45살이어서 기념으로 웃돈을 주고 45층에 살게 됐다’고 했습니다. 김여사가 90층에 사니까 45층 여자는 김여사의 절반 층입니다. 인생으로 말하면 생의 반을 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김여사가 90층에 사는 데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최소한 90살까지는 살 수 있다고 생각헤 90층을 구입한 것입니다. 꼭대기 100층에 산다는 것은 욕심이 과한 것 같았습니다. 100세 시대라고는 하지만 벽화를 그리면서 100살까지 산다는 것은 지옥이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날마다 운동을 하고 건강식을 먹고 영양제를 먹으면 90살 까지는 무난할 것 같습니다.
김여사와 45층 여자는 산에서 내려와 사우나에 들렸습니다. 입구에 있는 헬스장에 들어가 준비운동을 하고 러닝머신을 탔습니다. 45층 여자는 러닝머신 속도를 최고로 올려놓고 달립니다. 김여사는 쳐다보는 것만으로 어질어질 합니다. 둘은 버터플라이도 하고 역기도 들고 줄넘기도 했습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집니다.
사우나 실에 들어선 김여사와 45층 여자는 간단한 샤워를 하고 몸무게야 줄어라 줄어라 하면서 온탕과 냉탕을 들락 거렸습니다. 오늘 따라 사우나 실에 온 여자들은 씨름 선수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김여사는 대형거울에 자신의 몸을 비춰 보면서 이 정도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우나를 마친 김여사와 45층 여자는 커피숍에 들렸습니다. 45층 여자가 땀을 뺐으니 시원한 팥빙수를 먹자고 합니다. 팥빙수는 너무 달아서 나는 다른 것을 먹겠다고 했습니다. 김여사는 당뇨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줄을 모르는 45층 여자는 한 수저만 먹어보라고 권합니다. 못이기는 척 한 수저를 떠먹자 시원하고 단맛이 그만입니다. 한 수저를 더 먹었습니다. 자꾸만 먹고 싶습니다. 사탄의 유혹이라고 생각합니다.
아파트에 돌아 온 김여사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습니다. 엘리베이터가 꼼짝하지 않습니다. 이상했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개를 들어보니‘엘리베이터 점검 중’이라는 글씨가 눈을 빨갛게 뜨고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김여사는‘앗차’하고 신음소릴 냅니다. 아침에 나갈 때 자정부터는 엘리베이터 점검한다는 안내문을 읽었다는 사실을 깜빡했습니다.
김여사는 계단을 오르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빈 배낭 이였지만 등에 배낭이 있고 손에는 등산 스틱이 들려 있습니다. 등산을 하고 사우나에서 땀까지 뺀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겁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김여사는 이를 악물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1층을 오르고 2층을 오리고 3층을 오르자 장단지가 당기기 시작했습니다. 10층, 20층 올라갈수록 짊어진 배낭이 귀찮아졌습니다. 40층에 오르면서 부터는 손에 든 등산 스틱이 무거운 짐 덩이로 변했습니다. 45층에 다다르자 언니라고 부르는 여자가 생각났습니다. 물이라도 얻어먹을까 생각했습니다. 새벽 1시가 넘은 시각에 잠자는 사람을 깨운다는 것은 실례일 것 같아 참았습니다. 힘에 부쳐 헐떡거리는 김여사는 45층 문 앞에 등산가방과 등산스틱을 내려놓았습니다. 내일 아침에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맨 몸이 되자 김여사는 살 것 같았습니다. 인생 40대에 이르면 경쟁은 더욱 심해지고 일은 더욱 힘겨워지면서 자신이 무능해지고 주위의 탓을 하며 불평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소중한 시간을 허비합니다. 살면서 가장 비참할 때는 내가 지고 가야할 짐이 없을 때라는 말이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짐이 가벼워지기를 바라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이 위험하다고 한 철학자의 말을 곱씹었습니다.
45층을 출발해 위층으로 올라가는 김여사는 이제 인생의 후반전이 시작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층 한층 오를수록 힘들었습니다. 여기서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고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픕니다. 그렇다고 다시 내려갈 수는 없습니다. 죽기 살기로 90층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60층에 다다랐을 때 이었습니다. 여자 하나가 계단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김여사는 머리가 주뼛 섰습니다. 머리가 하얀 여자는 한눈에 봐도 70객이었습니다. 여자가 거친 숨을 내쉽니다. 놀란 김여사가 누구신데 여기에 누워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여자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몸이 많이 아프다고 합니다. 김여사가 몇 층에 사느냐고 묻자 여자는 75층에 산다고 했습니다. 말을 듣는 순간 김여사는 순간 앞으로도 15층이나 남았다고 생각하니 난감했습니다. 여자를 놔두고 그냥 갈수도 없고 그렇다고 뾰족한 방법도 없습니다. 그나저나 올라갸야되지 않느냐고 김여사가 말하자 여자는 힘이 없어 걸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김여사는 자신의 오른팔을 내밀며 내 팔을 잡고 올라갑시다고 하자 여자가 김여사의 팔을 잡고 일어섭니다. 김여사와 여자는 한자 '人'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의지하는 형상입니다. 한사람이 한사람을 버리면 넘어진다는 것이‘人’의 이치입니다. 서로에게 기대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사람살이인 삶입니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은 올라가는 계단이 있을 뿐 내려오는 계단은 없습니다. 그래도 이승의 계단은 오르내릴 수 있고 동행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 다행이라고 김여사는 생각했습니다.
낑낑대며 75층에 다다르자 여자는 연신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김여사는 여자가 초인종을 누르는 것을 확인하고 계단을 오릅니다. 언제가 봤던 영화‘집으로’가 생각납니다. 도시에 살던 상우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 산골에 홀로 사는 외할머니에게 맡겨집니다. 외할머니는 말을 못하며 상우의 말도 잘 알아듣지 못하지만 아낌없는 사랑을 베풉니다. 상우는 처음에는 투정만 부리며 외할머니를 괴롭히지만 차츰 외할머니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나이 70세에 들어서면 젊은 시절의 기세등등했던 패기와 열정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남을 원망하거나 자책하지 않고 현실에 순응해야 80‧90세까지 걸어갑니다. 황혼 앞에 다다르면 문득 진한 슬픔이 밀려듭니다. 그것은 한세상을 살아가면서 중요한 꿈과 열정과 희망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영화‘집으로’에서 손자 역을 맡은 어린이는 영화 속의 상우와 많이 닮았다고 합니다. 연기를 하기 싫다고 투정부리는 어린이를 어린이의 엄마가 달래서 연기를 시켰습니다. 할머니 역을 맡은 분은 어린이에게 감자, 옥수수 등 간식을 아낌없이 제공하며 친손자와 다를 바 없이 대해줬다고 합니다. 영화‘집으로’의 촬영이 끝나고 어린이가 돌아갈 때 할머니 역을 맡은 분은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영화 속의 상우와 할머니는 서로의 삶을 지탱하는 '人' 자 였습니다.
김여사는 젖 먹던 힘까지 쏟아 부어 드디어 90층 자신의 집 앞에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힘들었던 것들이 한 순간에 봄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포켓에 손을 넣는 순간‘앗, 열쇠?’주차장에 있는 자가용 콘솔박스 속에 열쇠를 두고 온 것입니다. 김여사는 풀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인생은 일방통행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