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수의 문학론文學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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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일반
  • 2023.06.05
시인 정성수
 
 
정성수의 문학론文學論
 
 
누구나 한때,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고 싶은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나에게도 시나리오작가가 되어보겠다는 옹골찬 꿈이 있었다. 그 꿈을 이루고 싶어 시나리오 몇 편을 구해 밤을 새워 읽고 또 읽었다.
 
1963년 고2 어느 날, 종례 시간에 담임선생님께서 교지를 발간하니 원고를 제출하라는 숙제를 냈다. 고민에 고민을 하다가 친구와 의기투합해서 장편掌篇 수필 한 편을 만들었다. 제목을 ‘선물’이라고 붙였다. 그 글이 교지에 실렸다. 그게 나와 활자와의 첫 만남이었다.
 
나는 정식으로 문학 공부를 하지 않았다. 흔한 문학 교실에도 가 본 일도 없다. 나는 시를 어깨너머로 배웠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시를 쓰고 또 쓰는 일이었다. 그 시절 내 시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누구에게 물어볼 만한 사람도 없었다.
 
어느 날, 신문사에 시 한 편을 보냈다. 94년 12월 15일 (목) 서울신문에 시‘작별’이 게재되었다. 별 볼 없다고 생각한 내 시가 심사위원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생각에 울컥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에 매달렸다. 물론 내 시가 상투적인 말장난에 덧칠한 부분이 있다고 종아리를 걷으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 시는 밤하늘의 별과 같은 것이고 시를 쓰는 순간만큼은 행복하고 귀한 시간들이다. 내가 왜? 시 쓰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지! 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나에게 한편의 글을 쓰는 일은 행복하지만 두려운 일이다. 내밀한 생각과 사적인 비밀뿐만 아니라 나아가 삶의 일부까지도 타인들에게 보여주는 일은 마치 벗은 몸을 보여주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내 글을 읽고 나를 판단하거나 내 글과 다른 내 모습에 실망하면 어쩌나? 두렵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비난받을 여지가 있는 글은 스스로 엄격하게 점검한다. 정신적으로 힘든 날이 많지만 완성된 한편의 글은 위로와 위안이 되기에 충분했다.
 
세상에는 나보다 몇 배나 외롭고 힘든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 틈에서 부대끼고 어울리면서 세상의 고단한 길을 가는 이들을 위해서 한편의 글을 쓴다.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이 세상을 위로하는 것이고 끝내는 나 자신을 위로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 출판업계는 빈사 상태?
 
요즘 출판계가 대단히 어렵다고 한다. 두말할 것 없이 책이 안 팔린다는 것이다. 왜 책이 안 팔린단 말인가? 그것은 하루에도 수많은 책이 서점가에 쏟아져 나오지만 베스트셀러니 밀리언셀러는 있어도 정말 책다운 책이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교육 현장에서조차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하면서 극단적으로 줄 세우기에 치중하는 교육시스템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학원들은 구름같이 몰려드는 초등학생 잡기에 여념이 없다. 곧 유아 중심으로 교육시스템을 재편하려 들지도 모른다.
 
이런 추세로 말미암아 아동 출판시장은 올해 작년과 비교해 약 30% 정도 매출이 감소했다. 이런 하강의 속도는 갈수록 빨라질 것이라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너 죽고 나 살자’식의 이런 행태가 계속된다면, 결국 출판시스템이 완전히 붕괴하고 말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요즘 출판시장에는 전자책의 수요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어떤 평론가는 전자책은 올드미디어인 종이책의 자양분을 먹고 성장하고 종이책은 생존을 위해 자신만의 장점을 특화하는데 매달리게 되어 두 미디어가 상호 보완하며‘진정한 책의 시대’를 이끌 것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그러나 책을 읽히지 않는 것이 교육의 현실이다. 예를 들면 논술 준비를 하면서 모범 답안을 빠르게 작성하는 방법만 가르친다. 우리나라의 수학능력시험에 해당하는 프랑스 대학입학 시험인 바칼로레아의 기출 문제와 답안을 열심히 읽고 외우도록 한다. 이런 일은 책을 읽는 것이 아니어서 어떤 교사들은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할지 몰라도 많은 학생에게는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범 답안만 외우게 할 것이 아니라 한 권의 동화나 소설 등을 완독시키고 자기 삶과 비교하여 한 편의 글에 담아낼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 교육 현장에서는‘책 읽을 시간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제부터라도 아이들에게 책 읽는 습관을 길러 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곳곳에 도서관이나 도서실을 만들고 충분한 양의 책을 비치해야 한다.
 
아이들이 쉽게 접근해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하고, 신선한 책이 많이 갖춰져 있어야 한다. 그리고 소장 도서가 1만 권은 되어야 누가 들어와도 입맛에 맞는 책을 고를 수 있는 수준이 된다고 한다. 이처럼 어려서부터 책과 가까이하는 어린이들이 자라서 훌륭한 작가가 되고 수준 높은 글을 쓸 때 노벨문학상 수상도 가능한 것이다.
 
문학은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 발로한다. 관계는 바로 소통의 길이다. 치열한 경쟁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심리적 압박감과 경제 불황에서 상대적 빈곤감에 눌려 산다. 이런 때일수록 정신적인 초월의 세계가 필요하다. 이런 심리적 압박감과 상대적 빈곤감은 문학과의 만남을 통해서 치유할 수 있는 것이다.
 
문학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무너진 관계를 일으켜 줄 뿐만 아니라 이해의 다리를 놓아주어 서로에게 버팀목 역할을 하기도 한다. 결국 문학의 힘은 소통의 길을 트고, 서로가 서로에게 보내는 미소인 동시에 안아주는 넓은 가슴이다.
 
패거리 문학은 문학판의 독버섯
 
패거리는 현대에 사는 나약한 개인들이 집단을 만들어 그 안에서 무력감을 달래고자 하는 일종의 자기 자신의 위안이자 방어 자세다. 같은 목표를 위해 학연과 지연으로 뭉쳐 한 학교를 졸업한 동기나 선후배로 같은 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로 굳건하게 뭉쳐 동지가 되어 서로에게 기대면서 상부상조한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먹을 가까이하면 먹물을 뒤집어쓰거나 옷을 더럽힌다는 뜻으로 나쁜 사람을 가까이하면 그들에게 물들기 십상이니 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기와 질투와 음해가 무성한 문학판에 빌붙어 추천, 당선, 수상 등에 목을 매는 속물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인간들이 모인 곳에 패거리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패거리를 공동체 의식 또는 인간성 회복이라며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패거리가 꼭 잘못된 것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그것은 본래 좋은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패거리가 이기적이고 배타적이면 그때부터 부정과 부패가 시작된다. 잘못돼 가는 줄 알면서, 잘못된 것을 알면서 그것을 정당화하며 서로가 눈을 감아주는 것이 패거리들의 큰 실수다.
 
끝내는 뻔뻔해져도 뻔뻔하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 문제다. 결국 패거리는 명령과 복종이 있을 뿐 획일성이 주가 되고 다양성과 창조성을 말살시킬 뿐이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입술을 잃으면 이가 시릴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문학판이 바로 서야 문학이 살아남는다.
 
100세 시대 문인의 자세와 문학이 가야 할 방향
 
문학은‘~체’나‘~척’이 통하지 않는 분야다. 본령은‘어떤 것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렸다. 여기에 추가해야 할 것은 문인으로서 가져야 할 자세다. 요즘 책이 안 팔린다고 출판시장이 아우성을 친다.
 
문학의 소비층은 엄청나게 줄어드는 데 반해 공급 층은 갈수록 증가하고 있는 현실이다. 여기에 발을 맞추어야 한다는 듯이 문예지들은 헤아리기가 힘들 정도로 증가하고 있다. 문예지가 생존하려다 보니 무리수가 따른다. 무리수가 무분별한 문인들을 탄생시키고 이러한 문인들은 함량 미달의 글을 씀으로써 독자가 떠나고 있는 문학 시장을 부채질한다. 수많은 문인은 작품으로 승부하는 게 아니라 얼굴이나 이름 알리기에 혈안이 돼 있다. 문단에서 감투 쓰기를 좋아하고, 트러블 메이커가 되어 눈총을 받는 사실조차 모르는 실정이다.
 
특히 문학의 정치화야말로 문학을 죽이는 암 덩어리라는 걸 알아야 한다. 문인이라는 이름에는 적어도 그에 걸맞은 작품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신사고에 독자가 공감하고 인정하는 작품을 써야 문인으로 대접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문인 본연의 자세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문학지원금을 전폭 늘려 문인들의 작품 활동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창작환경을 만들어 줘야 한다. 노벨문학상을 타지 못한다고 불만만 하지 말고 우수한 인재가 몰려오도록 유인책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다. 요즘처럼 전업 작가가 생활이 되지 않는 현실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을 운운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선배 문인들은 자부심 하나로 고집스럽게 골방에서 쭈그리고 앉아 글을 썼다. 지금은 그게 아니다. 그래서 문인의 복지정책 수립이 급선무가 되었다. 복지정책은 바로 재원 확보다. 노동자들도 노동조합을 만들어 최저 임금을 보장받고 있다. 그러나 문인들은 날밤을 새워 글을 써도 원고료 한 푼 못 받는 현실이다. 당당하게 원고료 지급을 요청하지 않는 문인들이 많을 뿐만 아니라 원고료 지급을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악덕 출판사들도 많다. 대다수 문인들은 자비 출판을 당연시하고 있는 현실이다.
 
문학은 문인이라는 이름표를 붙인 특정인들만의 전유물이나 소유물이 아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의 세계는 더욱 아니다. 생활 속에 살아있는 삶과 관련된 이야기로서 문학이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문학도 좋고 남의 나라의 문학도 좋다. 그것은 문학이 없다면 꿈이 없기 때문이다.
 
문학의 역사성과 예술성으로 볼 때 전통과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우리 문학은 세계 어느 민족의 문학과 견주어 보아도 전혀 손색이 없다. 이런 우리 문학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하여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가꾸는 일이야말로 우리 문학인들이 해야 할 일이다. 산이 우리를 부르기 때문에 산에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산을 찾아가는 것이 산행인 것처럼 우리는 문학이라는 산에 적극적으로 오르면서 인생을 배워야 한다. 삶의 진솔한 이야기를 펼쳐가는 문학이 주는 감동은 우리의 건조한 삶에 향기를 주는 한 송이 꽃과 같다.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문인들이야말로 우리 문학을 갈고 닦는데 온 힘을 기울이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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