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인물> 대한민국의 제5대 한상대 국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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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3.01 20:58
                         ▲ 혼신을 다해 작업 중인 한상대 국새장
 
 
남북화합을 상징하는 통일국새를 만들고 싶어
 
우리나라에는 명인(名人), 명장, 무형문화재 등 최고 호칭을 받는 분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최고의 장인들이 이름에 걸맞지 않는 대접을 받고있는 분들이 많다는 것이다. 정부의 지원도 천편 일률적이다.
이 또한 학연, 지연에 따라 다르다. 제5대 대한민국의 국새장 역시 다르지 않다. 국새장임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특별한 지원도 없다.
이에따라 후진을 양성하기도 힘든 실정이다. 본지는 한상대 제5대 대한민국 국새장을 만나 그동안의 어렵게 걸어온 길과 국새장으로써 정부에 바라는 점,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알아보았다.       - 편집자 주
 
 
1. 안녕하세요. 대한민국 국새장인 한상대님과 인터뷰하게 되어 반갑습니다. 국새(國璽)는 “국권의 상 징으로 국가적 문서에 사용하던 임금의 도장 또는 나라를 대표하는 도장”을 가리킬 때 ‘국새’ 라고 하는 데요. 때문에 이 길은 제한적인 분들만 해 왔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워 도전하시는 분들이 많지 않은 것 으로 알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하시게 된 배경과 동기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국새(國璽)는 ‘고조선 환웅이 환인으로부터 천부인을 가져왔다’는 근거에서 비롯될 정도로 깊은 역사를 가졌습니다.
 
아무리 사인이 일반화된 서명시대이지만, 국새는 국가의 정신적 권위와 실체적 권력의 상징이고, 법적 효력까지 가졌습니다.
 
우리나라는 역사를 통해 보면 국새를 얻지 못한 왕은 신하들이나 백성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과거 국새는 하늘이 내린 것이고 나라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려·조선 시대에는 국인(國印)·새보(璽寶)·어보(御寶)·대보(大寶)라 하여 왕의 인장이 국새로 간주되었습니다.
 
이것은 국왕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대·교린의 외교 문서 및 왕명으로 행해지는 국내 문서에 사용되었습니다.
 
이전 삼국시대에 각국의 개성을 보여주는 다양한 금속공예품들이 나왔습니다. 고구려는 귀족의 장식구 및 무기류가 주로 발전했는데, 관모 뒤에 새의 깃을 꽂는 금동관과 태환식 귀걸이가 대표적입니다. 
 
백제 역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무령왕과 왕비의 금귀걸이와 금관 장식 등에서 우아하면서도 화려한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양감이 두드러진 백제 금동대향로도 만들어집니다. ‘금관의 나라’ 신라에서는 화려하고 정교한 금속공예가 발달했습니다.
 
제가 출생한 익산은 ‘서동왕자’로 친숙한 백제의 무왕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자 그의 마지막 염원이 깃든 미륵사지와 왕궁리유적이 남아 있는 곳입니다. 이 두 유적은 백제의 찬란했던 문화의 흔적과 고대 국가들과의 문화교류를 보여주는 유적지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유산에 등재됐습니다.
 
아울러 왕가의 사찰터인 제석사지와 무왕과 선화공주의 능으로 추정되는 쌍릉 그리고 동서남북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익산토성까지 백제문화와 관련하여 함께 둘러볼만한 여행지가 많습니다. 이러한 삼국의 역사적 배경과 흔적이 저를 제5대 국새 장인으로 있게 한 든든한 버팀목과 자양분이라 할 것입니다.
 
저의 유년시절은 예체능 쪽에 관심이 많은 아이였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막도장을 파기 시작했으니 나름 소질이 있었지요.(웃음) 붓글씨도 잘 썼고 사생대회 등에 나가 입상도 했습니다. 특히 태권도를 잘해서 국가대표 선수가 되겠다는 당찬 꿈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런데 무릎부상으로 더 이상 운동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진로를 바꾸게 되었습니다.
 
저는 전문대 공예학과에 진학했지만 배운 것이 너무 미진하다고 느꼈습니다. 마침 교수님의 권유로 저는 다시 원광대 1학년에 재입학해 금속공예를 처음부터 다시 배웠습니다. 4년 동안 열심히 배웠지만 대학에서 배운 것은 주로 예술성이라는 이론이었습니다. 실용성이 없다고 생각된 저는 1989년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실용을 배우기 위해서였습니다.
 
무일푼으로 서울에 올라와 취업을 하려는데, 대학 졸업자라는 이유로 안 받아 줬어요. 하지만 기술을 배우겠다는 간청 끝에 겨우 취업할 수 있었어요. 취업해서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기술 노출을 꺼린 선배들은 어깨 너머로 배우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저는 잘 곳이 없어 공방에서 종이상자를 깔고 자고, 배를 곯은 적도 다반사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힘든 어려움을 딛고 남대문·종로에서 배운 실용성이 국새 제작에 큰 도움이 됐습니다.
 
저는 세밀한 머리칼까지 재연하는 정밀주조 기술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통공예 분야에서부터 디자인과 거푸집, 주물까지 모두 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장인으로 손꼽히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제가 오늘날 최고의 자리에 있게 된 것은 지천명(知天命)의 염원과 섭리에 따른 귀결이라 할 것입니다.
 
 
2. 국새는 스승이 많지 않기 때문에 배우기 어렵고, 새로운 분야의 개척이 필요하셨을 텐데요. 명장님은 언제 어떻게 국새장이 되셨으며 그동안 주요 작품은 어떤 것이 있으신지요.
 
10여년 전 제4대 국새장의 사기행각으로 인해 국새가 ‘가짜’로 밝혀지는 국새 제작 부정으로 국·내외적으로 망신을 당하는 소동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지난 2011년 행정안전부의 국새 제작 공모가 있었고 이를 통해 제5대 국새 장인으로 등극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5대 국새 공모는 학맥이나 인맥보다는 투명성과 공정성을 바탕으로 오직 실력으로만 겨룰 수 있는 장이었습니다. 때문에 원광대 공예과를 나온 저는 당시로써는 무명작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금속공예 분야의 인간문화재나 외국에 유학해 디자인을 배운 유명 대학교수의 작품을 모두 제치고 제가 당선되었습니다.
 
당시 공모전에서는 국새를 만들고 누구의 작품인지 모르게 하기위해 자신의 이름을 쓰고 검정 테이프로 감아 제출했습니다. 
 
결국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인간문화재, 대학교수, 유명작가 등 실력가들과 경합을 벌인 끝에 무명의 제가 선정된 것입니다.
 
심사위원장이 철저하게 중립을 지키며 예술성, 실용성, 창의성, 상징성 위주로 심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인 이산하는 이 국새에 대해 “두 마리 봉황이 무궁화꽃을 피우며 날아 오르고/ 태양 속에서는 삼족오가 봉황의 날개를 끌어 당긴다/ 무궁화 꽃잎들이 천하를 가득 메운다”고 노래했습니다. 또한 “모든 것은 예리한 눈빛과 섬세한 손끝에서 나왔으니/ 그 외롭고 혹독한 수련의 세월을 무엇으로 말하리/ 그러나 가슴속에 항상 찬란한 국새를 품고 있었으니/ 온갖 차별과 굴욕의 순간들도 깃털처럼 가벼웠으리”라며, 제가 제작한 국새의 치열하고 고뇌어린 작품성에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로 화답하였습니다.
 
국새는 그 시대 최고의 예술성과 과학성이 결합한 결정체입니다. 제5대 국새 심사위원들이 남긴 심사평에 의하면 “조각기술이 섬세하며 안정적인 자세의 봉황과 적절히 조화된 생략과 강조의 부분이 잘 표현돼 상징의 표현을 넘어 국운의 기상을 잘 상징화 했다”는 호평을 받았습니다.
 
제5대 국새에서 특히 강조한 것은 선입니다. 주물 공정에서 선을 살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어렵습니다. 봉황의 벼슬에서 시작해 날개와 몸체를 감아 꼬리까지 내려오는 선이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저만의 독특한 선은 “부드러우면서 예리하고, 묵직하면서 날렵하고, 섬세하면서도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당시 심사위원장인 최응천 동국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봉황의 자세와 날개, 꼬리 부분을 역동감 있게 조각해, 힘 있고 단정하면서도 웅건한 봉황의 느낌을 충실히 표현하였고, 조각기술과 조형미가 뛰어난 작품”이라고 평가한 바 있습니다.
 
현재 많은 작품을 소장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매우 아쉬운 대목입니다. 저는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 기념 이봉주 마라톤화, 월드컵 트로피 금형 등을 제작했습니다.
 
MBC 전통사극 주몽, 선덕여왕, 이산, 동이 등에 쓰인 왕관과 비녀, 검 등 다양한 장신구를 제작하고, 궁중유물인 고궁박물관 소장 삼인검을 재현하기도 했으며, 20여 차례의 공모전 수상과 기능경기대회 심사장 및 심사위원 등을 역임했습니다. 아울러 익산에 있는 보석박물관 아트갤러리의 개막 초대전을 갖기도 했습니다.
 
3. 이 길을 걸으면서 특히 어려웠던 점과 반면에 보람이 있으셨다면 어떠한 것이 있는지요.
 
제가 국새를 만들고 받은 대가는 상금 500만원이 전부입니다. 이건 나라 망신이에요.
내가 돈을 더 받겠다고 그러는 게 아니라, 국새 장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이 그것밖에 안 된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아슬아슬하게 임대료 내고 재료비를 충당합니다. 예술은 돈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특히 금속공예 분야는 투자자를 엮고 이를 재벌이나 미술관 등과 연결하는 판로가 있어야 합니다. 이 분야도 학연과 지연으로 얽혀 있습니다.
재벌들이나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소장할 만한 고가 공예품은 ‘학벌’로 이어진 인맥으로 제작되고 거래됩니다. 적당히 타협할 줄 모르는 저의 성격상 이 또한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제5대 국새장이 되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새장으로 큰 보람을 느끼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4. 한상대 명장님은 제5대 국새장임에도 불구하고 정부에서 지원해 주는 것이 없으신 것 같은데 후진양 성을 위해서라도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한 것 같아요. 정부에 건의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지요.
 
우리 한민족 특유의 자랑스러운 기예와 재주가 대한민국을 기술 강국·경제 대국의 반열에 올려놓았다면, 우리 이웃의 수많은 장인에게 긍지와 자부심을 불어넣고 이들 자신의 계발과 또 다른 장인의 등장이 산업과 경제의 성장을 넘어 지역 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의 토대가 된다고 생각됩니다.
 
몇몇 사람들이 이 시장을 독점하고 있어 공예를 하는 후배들도 처음에는 의욕을 가지고 시작하지만, 수입이 되지 않아 대부분 그만두는 것을 보면 너무 안타깝습니다.
 
때문에 저는 지금까지 생각해 온 몇 가지를 정부에 건의하고 싶습니다. 첫째, 최고장인 ‘명예의 전당 설치’ 및 대시민 홍보 강화를 통해 ‘최고 장인의 가치와 예우’를 높여 주어야 합니다.
 
또한 숨은 장인을 찾아내고 장인이 되려는 사람을 늘려야 숙련된 기술의 저변 확대를 꾀할 수 있습니다.
 
둘째, 최고 장인의 해외 연수와 상호 교류 등을 통해 우리의 문화예술의 우수성과 자긍심을 줄 수 있으며, 자기계발과 발전의 계기를 제공해 세계적 수준의 장인으로 성장할 동기부여가 될 것입니다. 
 
셋째, 최고장인 기술 전수·보급을 위한 기업 및 대학과의 네트워크 구축으로 후학양성 제도기반을 마련하고 기술교육과 제조산업 참여 기회를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넷째, 최고장인 선정분야 및 직종을 시대적 변화에 따라 다각화해 보다 많은 장인을 발굴하고 양성하는 것입니다.
 
 
5. 끝으로 앞으로 목표나 희망, 이 일을 하고 싶은 후학들에게 해주실 말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세요.
 
작품 활동을 하면서는 만들어가는 과정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너무 안이하게 자기가 하는 것에 만족해선 안됩니다.
 
어느 정도 하면 끝날 줄 알았더니 모르는 게 자꾸 나와요.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게 별 것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죠.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해야 할 것이 정말 많아요. 사회학부터 인문학 전반, 과학 등등 다른 학문에 대한 다양한 관심을 갖고 깊이 있게 공부해야 해요.
 
좀 다른 말씀 같지만 한 나라를 유지 발전시키는 힘은 강력한 군사력이나 경제력 같은 외형적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도 그 나라 국민의 ‘정신문화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지역갈등, 계층 간 분열, 집단이기주의와 도덕적 해이 현상 등이 끊지 않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양질의 예술과 사회적 문화·복지 수준의 향상은 긴밀한 관계입니다.
 
다수가 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비효율성의 증대가 아니라 사회적 안전망을 확보하는 효과적인 투자라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아울러 초·중·고등학교에서 이뤄지는 예술 교육의 적극적인 지원이 청소년 문제와 사회 범죄율을 낮추는 데 매우 적절한 투자라는 것을 강조드리고 싶습니다.
 
‘문화융성’이라는 기조는 한 정권 내에서 당장 실효를 거둘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호흡을 길게 잡고, 정권이 바뀌더라도 동일한 의식과 공감대를 갖고 이 운동을 추진해 가겠다는 국가적인 의지가 필요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앞으로 후학을 지도하고, 전통공예와 문화상품 등을 계승 발전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싶습니다. 뛰어난 후계자가 나와야 하는데 그런 제자를 키우지 못하면 중도에 끊길 수 있다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때문에 경제성 작품보다 나만의 작품에 집중하고 싶은 거죠.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아닐까 합니다.
 
당초 내 인생의 목적은 인간문화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국새장이라는 칭호를 얻어 인생의 1차 목표를 이룬 셈입니다.
 
최종적인 예술적 작품으로 통일정부의 국새를 만들고 싶습니다. 남북의 화합을 상징하는 백두산과 한라산을 결합한 통일의 국새를 만들겠습니다.
 
현 국새는 새로 만든 남북통일을 결의하는 문서에 날인 한 뒤 영구 보관되고, 통일헌법에는 새로운 ‘통일국새’를 썼으면 합니다.
 
특히 올해는 민족의 진운을 결정하는 중요한 한해가 될 것입니다. 국민적 화합과 단결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장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터뷰=박광영 발행인
정   리=한금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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