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붕우 상명대 특임교수(전 육군정훈공보실장·예비역 육군 준장)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떨어져 간 전우야 잘 자라.”
‘바람 앞에 꺼져가는 등불’과 같던 대한민국을 살린 최후방어선 낙동강 전투 승리와 북한군의 허리를 일격에 자르며 인천을 넘어 서울을 단숨에 수복한 인천상륙작전이 가져다 준 진중가요 ‘전우야 잘 자라’ 1절이다.
유호 작가와 당시 육군 군예대 소속이던 박시춘 작곡가가 9·28 서울수복 직후 명동에서 우연히 만나 하룻밤 만에 만들었다고 한다. 낙동강과 인천에서 거머쥔 승리처럼 노래의 탄생도 전격적이다. 어느 하나 절박하지 않은 게 없던 시절, 그 절박함이 시대를 돌파하는 힘이 됐다.
6·25 당시 푸른 군복의 대한민국 군인들은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심장이 뿜어내는 붉은 핏빛에 휩싸이게 된다. 그들은 쓰러진 전우를 살필 겨를도 없이 적들을 물리치려 앞으로 내달렸다. 어렵게 잡은 진격의 발길은 누가 쓰러지든 결코 멈출 수 없었다. 바로 국가와 국민을 위해 목숨을 건 전장의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1950년 10월, 육군 6사단 7연대(초산부대)가 압록강에서 승리의 물을 길어 올리던 순간, 중공군은 이미 압록강을 넘어 전쟁에 개입했다. 통일을 목전에 두고 눈물의 1·4후퇴가 시작됐다. 남으로 발길을 돌리게 되자 ‘전우야 잘 자라’ 노래는 육군에서 금지됐다.
6·25전쟁, 북한 김일성이 저지른 민족상잔의 비극으로 인해 한국군 5만8809명, 유엔군 3만6000명(미군 3만3000명) 등 9만5000여 명, 북한군 52만 명, 중공군 90만 명이 사망했다. 약 99만 명의 민간인이 사망하거나 다쳤다. 북한 주민 1200만 명중 300만 명이 남으로 내려왔고, 1000만 이산가족이 생겼다.
맨 주먹 붉은 피로 나라를 지켜낸 그들 앞에 놓인 건 초토화된 국토와 ‘가난과 배고파 울고 있는 어린 자식들’뿐이었다. 하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괭이와 망치를 들고 농촌과 도시에서, 근면과 성실로 이역만리 독일과 중동에서 적군대신 가난을 무너뜨리는 산업전사가 되었다. 잘사는 대한민국 공동체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 어머니,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 그분들은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잃은 사랑하는 자식과 전우를 가슴에 묻고 전쟁과 가난을 넘어 여기까지 달려온 위대한 분들이다. 역사상 가장 치열한 시대를 관통하며, 역사상 가장 잘 사는 나라를 건설한 살아있는 전설이다. 6·25 당시 20대 청년이던 그분들은 이제 팔순을 넘긴 노인이 되었다. 그들은 회상하며 말씀하신다. “우리가 넘지 못한 게 있다”고.
전설들이 넘지 못한 ‘통일.’ 공은 우리에게 넘어왔다. 지금도 북한 김정은의 예측불허 행동과 북한 정권의 호전적이고 도발적인 태도는 상식을 넘어선다. 한반도의 위기 상황은 예측하지 못하는 순간 닥쳐 올 수 있다. 군대는 물론이고 국가차원에서 철저한 대비와 준비가 필요한 이유이다.
올해는 6·25전쟁 발발 65주년이다. 이제 더 큰 민족공동체, 그 고지를 생각할 때다. 우리의 지혜와 힘을 모으면 능히 넘을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의 몸속에는 가장 위대한 전설들의 피가 흐르고 처절한 전쟁과 지독한 가난을 넘은 DNA가 생생히 살아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