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昏君(혼군)과 奸臣(간신)을 반드시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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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2016.12.05 03:23
                                          정창섭 논설위원장  /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지금 온 나라가 난리다. 최고 통치자가 권력을 사유화하여 자신과 가까운 자에게 권력의 마술지팡이를 통째로 넘겨준 통에 나라의 모든 시스템이 엉망이 되었고, 비선이라는 이와 그 패거리가 온갖 이권에 개입하여 분탕질을 쳤다. 국민은 분노했고, 지난 3일에는 232 명의 국민이 자유민주 회복의 촛불을 치켜들었다.
 
어떤 언론은 이 비선 실세와 청와대 비서관들을 두고 환관(宦官)에 비유했고, 또는 간신(奸臣)이라고 꼬집었다. 그렇다. 봉건 왕조 체제에서나 있었던 간신 현상이 지금 나라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다.

간신의 출현은 어리석은 혼군(昏君)이란 존재를 전제로 한다. 간신 현상은 권력의 사유화라는 토양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간신과 혼군은 이란성 쌍생아이며, 권력의 사유화는 이란성 쌍생아의 모태가 된다.

역사를 거슬러 살펴보면 간신과 혼군 때문에 선량하고 충직한 사람이 수없이 희생됐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신음했다. 특히,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빠졌을 때조차 간신들의 짓거리 때문에 희생당한 충신도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역사는 간신과 혼군의 이런 간행(奸行)을 절대로 그냥 보아 넘기지 않는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 모든 국민이 목격하고 있는 이 수치스러운 간신 현상을 역사가 어떻게 기억하고 기록할 것인지를 절대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처절하게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이 어리석은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청나라 건륭 연간(1736∼1795년)에 장원급제한 항저우(杭州) 사람 진간천(秦澗泉)이란 자가 송나라 때의 명장 악비(岳飛)의 무덤인 악왕묘(岳王墓)를 찾아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사람들은 송나라 이후부터 회(檜)라는 이름을 부끄러워했고/ 나는 지금 그 무덤 앞에서 진(秦)이라는 성에 참담해 하는구나.’

1141년 명장 악비가 임안(臨安·지금의 항저우)의 풍파정(風波亭)에서 아들 악운(岳雲)과 함께 억울하게 처형당한 지 약 600년이 지난 청나라 때 장원급제한 젊은이가 어째서 악비의 무덤을 찾아 이런 시를 읊었을까? 이 젊은이는 다름 아닌 그 당시 악비를 모함해 죽이는 데 앞장섰던 간신 진회(秦檜)의 후손이었다.
 
진간천은 악비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역사의 대간신 진회의 부부상을 보며 치밀어 오르는 수치심과 감정을 참지 못하고 이런 글로 자신의 참담한 심경을 전했던 것이다.

소흥(紹興) 3년(1133), 악비는 대군을 이끌고 빼앗긴 땅과 성을 차례로 수복하여 금나라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특히, 주선진(朱仙鎭) 전투에서 대승함으로써 금나라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고, 부장마저도 악가군(岳家軍)의 칼날 아래 쓰러졌다.
 
금나라의 장수 금올술(金兀術)은 싸울 의욕을 잃고 그저 안전하게 북방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악비는 “자, 여러분과 함께 통쾌하게 마시리라”며 곧장 금나라 수도 황룡부(黃龍府)로 돌진하리라 맹세했다. 당시 백성들도 스스로 무기와 식량 등을 챙겨 “산을 뒤흔들기는 쉬워도 악가군을 뒤흔들기는 어렵다”고 함성을 지르며 너나없이 악가군을 따라 참전했다.

그러나 진회는 금나라 군대가 무너지면 지금까지 다져온 자신의 권력 기반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또, 금나라에 잡혀간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정말로 되돌아오는 날에는 천신만고 끝에 얻어 놓은 황제 고종(高宗)의 총애가 달아날까 두려웠으며, 악비가 자신의 ‘명성’과 지위를 뛰어넘을까 겁이 났다.
 
진회는 고종을 종용했다. 비상사태 때나 내리는 12도 금패(金牌)까지 발동하여 악비의 회군을 재촉했다. 그리하여 10년 공들여 쌓은 탑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말았다!

악가군이 회군한다는 소식은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가듯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이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뛰쳐나와 악가군의 회군을 막고 나섰다. 백성들은 악비의 말을 붙들고 실성한 목소리로 통곡했다.
 
“우리가 식량을 나르며 악가군을 맞이한 것을 금나라 도적들이 낱낱이 알고 있습니다. 한데 지금 상공께서 떠나시면 우리는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악비는 눈물만 철철 흘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악비는 회군하자마자 병권을 박탈당했다.

진회는 이 정도에 만족하지 않았다. 또다시 이런 위기가 닥칠까 봐 악비에게 이른바 ‘막수유(莫須有)’ 즉,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날조한) 모반죄를 씌워 그를 처형했다. 이때 악비의 나이 서른아홉이었다.

충신 악비는 처형당했고, 간신 진회는 부귀영화를 누리다 잘 죽었지만, 역사는 진회의 죄상을 잊지 않았다. 풍파정에서 악비는 고종과 진회의 교활한 웃음을 뒤로한 채 고독하게 죽었다. 하지만 역사는 그의 죽음을 또렷이 기억했다가 단호한 심판을 내렸다.
 
그리고 민중은 진회를 비롯한 네 명의 매국노(賣國奴)에게 쇳물을 부어 그 형상을 똑같이 만들어 악비 장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리고는 영원히 사죄하게 했다. 나라를 팔아먹고 의로운 사람들을 해친 간신 매국노들을 향한 준엄한 경고였다.

진간천이 무려 600년이나 지났음에도 자신의 조상인 진회를 수치스럽게 생각하며 악비 무덤 앞에서 참회의 시를 남긴 것도 역사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너무 잘 알았기 때문이다.

지금 역사가 준엄한 심판을 준비하고 있다.
 
 
내외매일뉴스/내외매일신문  (mailnews0114@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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