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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맞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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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일반
  • 2023.04.08 03:47
 
                    수필가 김덕남
 
 
서둘러 가버린 서산의 가을 해는, 아직도 오르지 않은 아침 해를 재촉하지도 않고 느긋하다. 부지런한 이들은 벌써 일어나 컴퓨터 앞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새벽 운동에 나선 이들도 한창 열심일 시간이다.
 
눈을 뜨면서 제일 먼저 시작하는 요가를 마치고 나면, 사방으로 툭 터진 14층 아파트 베란다에 나가 나만의 아침을 맞는다. 멀리 내다보이는 아파트 주방 쪽 작은 창에서 하나, 둘, 부지런한 빛을 밝힌다. 먼 출근길 자동차들이 여우 눈빛 같은 불빛을 쏘며 쏜살같이 내달린다.
 
수험생의 야간 도시락과 나를 포함한, 네 아이의 일곱 개나 되는 보온통과 풀어헤친 찬 그릇으로 식기 통은 늘 산더미였다. 정작 내 입으로는, 제대로 된 아침을 차분히 앉아 먹기도 힘들었던 모습이 저 불빛에서도 보이는듯하다. 젖은 머리를 수건에 싸매고, 얼굴에 발랐던 크림으로 끈적거리는 손을 씻으며, 아침 준비를 하던 널브러진 주방으로 다시 간다. 아이들을 깨우는 소리, 한술 더 먹이려 옥신거리는 소리, 아이들의 등교 준비와 내외의 출근 준비로 아침은 한바탕 부산한 벌떼들의 움직임이다. 주방으로, 욕실로, 세탁기 앞에서 베란다로 그리고 다시 화장대 앞으로, 슈퍼 여성이 된 내 모습을, 새어 나온 저 새벽 불빛에서 읽고 있다. 항상 쫓기던 시간의 구속에서 지금은 자유로워진 나, 이제는 아침이 마냥 여유롭고 편안하다.
 
아침이면 버릇처럼 베란다의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두 팔을 벌려 깊게 숨을 빨아들인다. 폐부 깊숙한 곳으로 빨려오는 상큼한 공기에, 밤새 쌓였던 온몸의 찌꺼기가 모두 빠져나가는 쾌감을 맛본다. 내가 사는 고층 아파트 남쪽으로는, 낮은 주택들이 바둑판같은 마을을 이루며 드넓게 자리하고 있어, 거칠 것 없이 불어오는 상쾌한 이 바람을 방해하지 않아 참 다행이다.
 
어둡던 무대 위로 오페라의 서곡이 잔잔히 퍼지듯, 여명은 동편 하늘로부터 옅은 살구빛깔의 구름 융단을 편다. 밤새 온 세상을 밝히던 교회 지붕 끝, 붉은 십자가의 불빛들이 가로등과 함께 제 할 일을 마치고 하나둘 사라진다. 저 멀리 보이는 산들은 농도를 달리한 원근의 채색으로 운무를 휘감은 수묵화처럼 뿌옇고 편편하다. 붓끝에서 단숨에 그어 놓은 것 같은 능선만이 산의 경계를 이루며 떠 있다. 묵직하고 희끄무레하던 것들이 서서히 뭉실뭉실한 숲의 형체와 건물의 실체를 드러내며 겹겹이 내 앞으로 다가선다. 구름은 오렌지빛을 더하더니, 파스텔 색조의 옅은 하늘빛 아침 하늘을 연출한다. 위용 있는 군주! 어느새 동산 위로 한 치쯤 떠오른 오늘의 태양이 찬란하다.
 
아침 해를 사랑하는 벅찬 가슴은, 해를 품고 싶은 욕망으로 손바닥 그늘을 만들어 해를 향해 정면 응시를 해 본다. 망막에 시린 잔영은, 태양의 노여움으로 다시는 밝은 세상을 못 볼 것 같은 고통을 주면서 어리석고 무모한 짓을, 무릎 꿇게 한다.
 
어둠에서 깨어나게 하고, 새바람과 새 빛을 허락해 주신 감사에, 두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은다. 밖으로 길게 고개를 내밀어 먼 서쪽으로 끝없이 이어진 하늘과 마을 끝의 아침을 본다. 오늘도 이 아래, 저 곳곳에서 어김없는 다양한 삶의 그림들이 펼쳐질 것이다. 힘들어서 고단하고, 절망으로 비통할 사람들, 그리고 보람 있는 일로 뿌듯하고, 사랑을 나눈 기쁨으로 충만할 사람들의 모습들이다. 새로운 오늘이 생의 시작이었고, 또 생의 마지막이 된 사람들, 그 모습들까지도 장엄하게 다가온다.
 
내게 주신 소중한 오늘, 나는 어떤 모습으로 이 하루를 보내야 할까! 어느새 풍성한 햇살은, 창을 넘어 안방의 장롱 벽 깊숙이 환한 빛으로 들어 와 앉았다. 햇살을 품은‘사랑 초’도 나비 같은 몸짓으로 제 잎을 피며 아침 해를 반긴다.
 
이제 들어가, 식구들의 건강한 아침을 차려야지. 그리고 소중한 이 하루를 부지런히 그리고 열심히 또 움직여 보자. 태양은 더 강렬한 빛으로 한 뼘이나 저만큼 올라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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