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만 영화 세 편이 남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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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2.23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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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와 복수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화예술 작품의 최고 소재 중 하나였다.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드’에서부터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내면 속에 들끓는 분노와 복수의 감정은 훌륭한 문학작품으로 승화되었다. 개인적 분노는 역사를 바꾸기도 했다.

 

분노와 복수의 스토리는 작금의 영화와 드라마에서 와서는 만드는 이나 보는 이로부터 더 사랑을 받는 것 같다. 이른바 막장드라마에서는 두말할 것도 없이 패륜, 출생의 비밀과 버무려져 단골 소재가 된 지 오래이고 최근 영화계에서도 최고의 흥행 소재로 떠올랐다.

 

지난해 관객수 1300만 명을 넘겨 한국 영화 역대 순위 3위를 기록한 영화 ‘베테랑’과, 감독판까지 합해서 1000만 명에 근접한 ‘내부자들’, 그리고 설부터 극장가를 독점하다시피하면서 1000만을 향해 가는 ‘검사외전’이 그렇다.

 

‘햄릿’이나 드라마에서의 분노와 복수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하지만 세 영화는 공통적으로 그 분노가 일종의 사회적 분노이자 대리 복수라는 점에서 다르다. ‘내부자들’에서는 정치깡패, ‘검사외전’에서는 억울한 열혈검사의 개인적 복수로 시작하긴 하지만, 결국 영화 전반은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힌 사회의 비리 메커니즘을 건드리며 그 복수의 칼끝이 겨냥하는 건 비리 정치권력이든 악덕재벌이든 ‘권력’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정의가 승리하고 관객은 대리 복수의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이 영화들을 비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시나리오의 현실성이나 개연성에 적잖이 실망을 하긴 했다. 필자도 언론계에 몸담았었지만 신문사 논설주간 한 명이 부도덕한 재벌과 결탁해 어찌 한 나라의 대통령 선거판을 좌지우지할 수 있으며, 대통령이 되려는 유력후보가 CCTV와 몰카가 횡행하는 이 대명천지에 섹스파티, 성기동맹을 그리 태연히 즐길 수 있을까. 결국 자기 발등을 찍고 마는 것으로 귀결되지만. 하지만 ‘뭐 영화이니까’ 라고 넘어갔다.

 

영화는 재미있었다. 민감한 정치사회적 이슈를 건드리고 권력형 비리를 타파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투톱 남자 배우들(이 조합이 유행인가 보다)의 거친 활약, 스타급 조연 배우들의 연기 등. 하지만 이런 류의 영화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한국 영화 기록을 갈아치울 정도로 흥행하는 걸 보면서 기분이 그리 후련하거나 썩 좋지만은 않았다.

 

이제는 사회적 분노가 ‘마케팅’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영화는 재벌이나 그 3세, 정치인을 거대악으로 지나치게 단순화해서 극적 효과를 노린다. 분노를 일으킬 사안에 대해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는 것도 문제지만, 분노만 확대재생산하는 것 또한 바람직한 것은 아닐 것이다.

 

요즘 들어 우리 사회의, 일반 국민의 분노치가 점점 임계점을 향해 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언제부터인가 가진 자의 부당한 갑질에 대한 을의 분노나, 개념 없는 사람에 대한 일반의 분노가 인터넷과 소셜네크워크의 발달과 함께 두드러지게 때론 지나치다할 정도로 우리 사회정서를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 대중의 그런 심리를 잘 아는 언론도 비중 있게, 저질 언론은 대중심리에 편승해 선정적으로까지 다루고 있다.

 

개똥녀, 재벌맷값, 남양우유, 열정페이, 부당해고, 백화점모녀, 라면상무, 땅콩회항, 몽고식품에 이르기까지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갑질 시리즈는 큰 사회적 파장과 분노를 불러왔다. 신상이 털리고, 기업은 한순간에 큰 타격을 입었고, 물의를 일으킨 장본인은 사회에서 매장되었다.

 

그게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갑질과 권력, 불평등에 대한 공분(公憤)의 온도가 점차 뜨거워져 가고 있는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정서에 대한 관찰이다. 물론 우리만의 문제도 아니다. 2011년 뉴욕에서 시작돼 전 세계로 퍼진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시위도 빈부격차 심화, 금융기관의 부도덕성이라는 공적 분노에서 출발했다.

 

분노의 정서는 특히 작년부터 청년실업 문제가 만든 ‘수저계급론’ ‘헬조선’ 같은 최고의 유행어에서 보듯 젊은 세대의 절망감 무력감 불신감이 더욱 불을 당겼다고 볼 수 있다. 아니 ‘내부자들’의 이강희 논설주간의 말처럼 ‘볼 수 있다가 아니고 매우 보여진다’라고 말하고 싶다.

 

이 영화에서 검사 우장훈(조승우)은 이른바 흙수저에 족보도 없고 지방대 출신이어서 승진길이 막히자 한 건을 올리기 위해 상부의 지시로 재벌과 유력 대선후보의 비자금 저격수를 자처한다. 영화는 내내 강조한다. 그의 부장검사는 무릎을 꿇은 우 검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러기에 잘 좀 하지 그랬어, 아니면 잘 태어나던가.”

 

분노와는 조금 다르지만 요즘 ‘혐오’도 키워드이다. 특정 성(특히 여성)이나 출신지, 정파집단에 대한 무조건적 혐오를 내뿜어대는 ‘혐(嫌)’ 카페나 ‘충(蟲)’ 이라는 신조어가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대립과 반목과 갈등의 정서를 뿌리고 있다. 혐오는 또 그에 대한 혐오를 낳아서 ‘혐혐’이 란 커뮤니티도 만들어졌다.

 

영화는 영화로 볼 일이고, 혐이든 충이든 그들만의 리그는 그들만의 리그이다. 하지만 영화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속성이 있다. 자막이 올라가며 대리응징에 대한 순간적 카타르시스는 느끼지만, 이런 자문이 남았다. 우리 사회의 ‘분노의 행진’은 어디서 멈출 것인가.

 

당분간 브레이크는 없어 보인다. 답답하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스스로 분노의 정서만을 확대재생산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돌아오는 건 세상에 대한 염증뿐이니까. 세 영화의 1000만 흥행이 말하는 건 무얼까. 대리 카타르시스가 아닌, 진짜 카타르시스를 위한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의 숙의와 성찰이 절실한 때다.

 

한기봉

◆ 한기봉 언론인

한국일보에서 30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편집국부국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한기봉 전.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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